ADHD 판정을 받은 지 어언 1년..
또 한 번 약이 바뀌었다. 대신.. 부드~러운걸로! :)
처음 방문한 병원에서 스트레스 반응 검사와 ADD 검사를 마치고,
약물치료를 시작했을 때, 갖가지 부작용으로 참 힘들었다.
조증, 식욕감퇴, 불면증, 피부 알러지, 체중감소, 구토, 목을 죄는 듯한 느낌 등등..
급작스러운 변화에 마음도 힘들지만,
죽어있는 신경을 깨우는 일인지라 몸도 함께 힘들었나 보다.
내게 맞는 약을 찾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내원하고,
여러 번 약을 바꾸고, 한 삼개월이 지났을까?
"이젠 좀 약에 익숙해지나보다~" 하니.. 가끔 피부가 간지러운 것 빼곤,
지금은 아침에 일터에 오자마자 약을 챙겨먹는건 일상이 되어버렸다.
가끔 약을 빼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교수님께 들은 말로,
"하루 skip 하면.. 그 때부터 다시 시작이야. 지금까지 먹은 약은 무용지물이지.."
그 이후, 나는 정말 악착같이 먹었다. 주말에 깜빡하고 약을 챙겨나오지 못하면,
한껏 짜증이 올라와 울면서라도 3-4시쯤 와서 약을 챙겨먹었다.
(약을 먹지 않아 그런건지.. 아닌지 모르지만.. 약을 거르는 그 날은 꼭-
나의 temper가 조절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었다.)
그렇게..1년이 지났다.
2주 전, 병원에 내원했을 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가장 기쁘고 좋았던건.. 원장쌤의 한 마디.
원장님 : "약을 바꾸어 진행하려 합니다. 부작용들은 좀 덜한 부드러운 걸로.."
엉뚱이 : "끼얏!!!!!!!!!!!!!!!!!!!!!!!!!!!!!!!!!!!!!! >_<"
원장님도 치료를 감내해 내는 내가 기특하셨는지,
'늦은 것도 없고, 빠른 것도 없습니다.
본인의 상태가 어느정도에 와있는지, 치료의 단계가 어디까지 왔는지
스스로 볼 수 있는 상태에 왔다는 것에 감사하도록 합시다.' 라고..
격려해주셨다.
일년이 지난 지금,
약이 바뀌고 또 다른 치료의 단계로 들어간다.
내가 내 모습을 찾고, 조금 더 성장하려면..
계속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겠지만..
두려워 하지 않으련다. 더 힘을 내어야지.
"새 포도주는 복음이자 내 성장의 원동력이며
성장을 위해선 불안하고 모험인 상태를 즐겨야 할테니까.."
[1년새 참 많이 바뀌었구나, 엉뚱이..
'더 힘을 내어야지!' 라는 기특한 생각도 할 줄 알고..]
힘이 되어 줬던 그 설교, 요약한 김에 홀랑 올려봅니다. ^ㅡ^*
'새 포도주로 여는 잔치'
2011년 7월 3일 그루터기교회 주일예배 설교 / 안용성 목사 누가복음 5장 30절-39절
오늘의 본문은 두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시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문제 삼자 예수께서 그에 응답하시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왜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응답하시는 장면입니다. 두 장면 모두 예수가 왜 바리새파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인데, 예수는 그 이유를 다음의 은유를 사용하여 한 마디로 보여주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눅5:38)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 고수와 철저한 금식은 그들의 유대적 경건에 대한 과시였고, 그들과 세리, 죄인들과의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철저할수록 그들은 더 경건한 유대인으로 드러났을 것이고 죄인들과 더 분명히 구별됐을 것입니다. 달리말하면, 죄인들은 더 분명히 죄인으로 드러나게 됐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그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경계선을 다시 넘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고 말하였다.(행11:18)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의 자녀가 될 자격을 박탈당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그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이 보기에, 이러한 회개는 거룩한 종교적 질서를 깨뜨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그리고 새 가죽부대와 낡은 가죽부대에 비유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새 부대에 담아야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새 포도주는 왕성한 발효 활동으로 팽창력이 강하기 때문에 유연한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만일 유연성이 약한 낡은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팽창하면서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결법이 만들어낸 배제와 차별의 시스템, 죄인들을 밀어내고 의인들만을 허용하는 배타적 울타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복음은 그 울타리를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음을 그 울타리에 가두고자 한다면 복음의 팽창력이 그 울타리를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낯설고 불편한 새 포도주
그러나 맛으로 따지자면 새 포도주는 묵은 포도주만 못합니다. 묵은 포도주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입맛에 그것은 낯설고 불편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새 포도주처럼 팽창력이 있어서 우리가 설정해 놓은 울타리들을 부수고 나갑니다. 울타리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그들을 우리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놓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불편합니다.
이는 예수를 새롭게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고 오래 예수를 믿어온 사람들에게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편안한 상태에 머물러 쉬고 싶어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배우려 애쓰고 먼저 믿은 사람을 닮으려 애쓰지만, 교회에 한동안 다니고 나면 이제 득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합니다. 가르치고 싶어 합니다.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모험이기에 피곤한 일이기에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변화를 유도하는 복음은 여전히 무언가 불편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면 이러한 불편함이 있습니다. 불편한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새 포도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묵은 포도주처럼 우리에 입에 착 달라붙지 않고, 왠지 달착지근하면서도 떨떠름하고, 달콤하면서도 시큼하고 때로는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새 포도주로 잔치를 여시는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께서 새 포도주로 여시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다시 익숙해지고 낯선 것에 다시 친숙해질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우리 안에 있는 레위, 관습에 안주하여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고 변화와 성장을 거부하며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은 모두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한 우리 안의 바리새인과 레위를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와 같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베푸는 새 포도주의 잔치는 네가 싫어하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회개에로 초대하기 위해 왔다.”
내 안의 바리새인과 레위를 향한 변화와 성장의 초대에 우리 자신과 교회를 내어 드립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시는 새 포도주의 잔치를 먹고 마시고 즐깁시다.